자아의 탄생 - 이것은 엄청난 일이다. 에번스가 오토 랑크의 출생 외상을 예를 들어 랑크가 생각했듯이 이런 외상이 자아의 성장에 내내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할 때 융은 이런 뜻의 대답을 하였다. “자아가 태어났다는 것은 자아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고도로 외 상적입니다. 만일에 당신이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시오. 에번스의 질문은 대단히 유치한 것이어서 융이 ‘출생외상’을 글자 그대로 믿느냐의 여부에 쏠려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며, 태어나지 않은 심리학을 볼 수 없다. 그것은 어떠한 존재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므로 “이것이 외상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의식은 무의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격렬한 노력이 필요한 조건이다. 의식됨으로써 사람은 피곤해진다. 의식에 의해서 사람들은 지친다.” 융에 의하면 원시인들은 쉽게 멍해진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앉아 있는 수가 있다.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기분을 상한다. 그 이유를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미친 사람만이 생각한다. 그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뱃속에서나 가슴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흑인종족은 생각이란 오직 배 속에 있음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실제로 간, 장, 위를 해치는 생각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오직 감정적 사고만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융은 말한다. 의식이 무의식에 비길 데 없이 적다고 해서 융이 마치 의식의 기능을 무시하고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자아를 ‘충동의 종속물’처럼 생각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자아가 없으면 인간 정신의 성숙도 불가능하고 융의 개성화도 불가능하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하려면 자아가 있고 의식이 있어야 한다. 조현병에서 처럼 자아가 분열되면 모든 가치 감각이 사라지고 능동적인 재생을 꾀하기 어려워진다. 또한 무의식은 자아의 무의식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반응하게 된다.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자 하면 할수록 무의식은 그의 창조적인 암시를 더욱 활발히 내보내게 된다.
“자아 콤플렉스는 마치 자석과 같은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내용을 우리가 모르는 어둠의 세계에서 끌어당긴다. 그것은 또한 밖에서 오는 여러 인상들을 끌어당긴다. 그것들이 자아와 관련을 가지게 되면 그것들은 의식이 된다.” 의식은 좁은 것이라 하였다. 의식에 비해 무의식은 작은 섬을 둘러싼 대양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글자 그대로만 믿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의식은 작은 섬처럼 가만히 있는 실체가 아니고 항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무의식은 무한히 크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도 커지고 있다.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함으로써 의식은 그의 시야를 넓혀 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이미 완성된 산물이 아닙니다. - 그것은 세워나갑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자아의 새로운 작은 측면들을 해마다 발견하지 않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에번스에 대한 융의 대답이다. 융은 1946년 발표한 논문에서 의식의 문제를 다시금 거론하면서 무의식은 의식과 비슷한 점이 없는가 하는 생각을 제기하고 있다. 무의식도 마치 주체가 있는 것처럼 지각하며, 생각하며, 느끼며, 의욕 하며, 기도하면서 계속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무의식을 그야말로 하 의식 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반문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과 꼭 같은 것은 아니므로 의식적 상태와 무의식적 상태 사이에 개연적 의식이라는 중간 물을 가상할 수 있다고 했다. 의식에 면하고 있는 무의식이 항상 변하여 어떤 때는 의식이 되었다가 어떤 때는 무의식이 되는 것처럼 의식 자체도 상대적이어서 여러 가지 강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즉 “내가 한다”와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안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맹목적인 행동이고 하나는 의식된 행동, 또는 그 행동에 대한 의식성을 말한다. 무의식성이 우세한 의식이 있고, 의식성이 우세한 의식이 있다. “의식의 빛은 우리가 직접적인 경험으로 아는 것처럼 여러 가지 명암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아 콤플렉스는 그 강조하는 정도에 많은 단계가 있다. 동물적인 원시적 단계에서는 단순한 광채가 지배하며 이것은 해리된 자아 단편들의 명암도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후자는 유아나 원시인 단계에서 의식이 굳건하게 형성된 자아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모이지 못하고 내적 또는 외적 사건, 본능, 정감이 환기하는 곳에서 여기저기에 불 피우러 오른다. 이 단계에서는 의식은 아직 통일성을 이루지 못한다. 자아의식은 많은 작은 광채로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존재를 참으로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무의식’ 또는 ‘무의식적’이라는 말을 쓴다. 또는 너무나 쉽게 그런 것은 없다고 단정한다. 그런 것이 과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것이 차라리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바람직한 태도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있다고 하니까 있고 없다고 하니까 없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것을 스스로 경험해 봄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개념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경험을 토대로 얻은 사실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경험이란 그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므로 같은 심리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학설 가운데도 무의식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는 학설이 있고, 또한 같은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내용과 기능을 말할 때 견해 차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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