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구조와 기능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고정 불변한 여러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그것이 마치 하나의 복잡한 기계처럼 어떤 일정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에 대한 지나친 기계론적 설명은 아직 그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을 몇 가지 단순한 개념의 울타리 속에 가둠으로써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박탈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융 자신도 말했듯이 주관적 경험적 방법에 의한 심리 학설에 있어서는 개념이 그의 학설을 대변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만들지 않을 수 없고 그 개념의 의미와 전제를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특성을 설명하는 데도 각기 그 특징을 이정한 말로 표현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말, 즉 용어가 아니라 그 내용, 즉 ‘뜻’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가. 우선 ‘나’ (Ego) 라는 것이 있다. ‘자아’가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강하든 약하든 ‘나’란 있게 마련이다. ‘나’의 둘레에는 의식이 있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모든 것, 내 생각, 내 마음, 내 느낌, 나의 이념, 나의 과거, 내가 아는 이 세계, 무엇이든 자아를 통해서 연상되는 정신적 내용은 의식이다. ‘나’는 이 의식의 중심에 위치한다.
‘내’가 아는 세계가 의식이라면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아직 모르는 정신세계를 무의식이라 부른다. 자아에 속하지 않으며 자아와 아직 연관되지 않고 있는 모든 심리적 경향, 내용들을 통틀어서 무의식이라 부른다. ‘무의식’이라는 말은 썩 좋은 말이 아니고 오해받기 쉬운 말이지만 달리 더 적합한 표현이 없으므로 그대로 이 말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다. 무의식이란 아직 의식되지 않은 정신세계로서 자아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미지의 정신세계(미의식)라 불러도 상관은 없는 것이다. ‘나’(자아)는 한편으로는 외계와 관계를 맺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 내게 (internal world)와 관계를 갖게 되어 있다. 우리가 ‘사회’라든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계를 갖고 거기에 적응해 가는 가운데 인간에게는 각종 대사회적 적응 태도라든가 역할을 준다. 이러한 적응 수단은 대부분 어느 집단이 공유하는 수단이며 그 개인에 특유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집단이 개인에게 준 역할, 의무, 약속 그 밖의 여러 행동 양식을 융은 ‘페르소나’ (Persona)라 불렀다. 이것은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인 만큼 그 개체의 외적 인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외적 인격에 대응해서 내적 인격이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의 경우 그 내적 인격의 특성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남성의 내적 인경을 아니마(Anima), 여성의 내적 인격을 아니무스(Animus)라 불렀다. 외적 인격이 자아가 외계와 관계를 맺도록 하는 매개체라고 한다면 내적 인격은 자아가 무의식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중요한 다리의 역할을 한다. 무의식이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프로이트가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의식으로부터 억압되어 생긴 것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서는 일단 의식되었던 것이 억압되어 이루어지거나 특히 억압이라는 기전이 작용함이 없이 단순히 잊어버렸거나 워낙 의식에 주는 영향이 미미해서 의식되지 못한 모든 심리적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층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의식에 의해서 그것이라고 인식되지 못한 채 정신작용에 여러 가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전자는 그 내용이 개인의 출생 이후의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뜻에서 ‘개인적 무의식’이라 부르며, 후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 있어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서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콤플렉스’란 의식, 무의식 모두를 구성하는 것이지만 특히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을 이루는 ‘콤플렉스’를 상(Imago) 또는 원초적 또는 근원적 유형 (줄인 말로 원형)이라고 한다.
의식의 중심으로서의 자아는 나의 정신의 의식된 부분에 불과하므로 그것이 나의 전체를 통괄하고 자각하려면 무의식적인 것을 하나씩 깨달아 나가는 의식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부딪치는 무의식의 내용은 ‘그림자’이다. ‘그림자’란 자아의식의 무의식적인 부분을 말한다. 아직은 어둠 속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자아의 일부분이다. 보통 ‘그림자’ 다음에는 ‘심혼’, ‘심령’의 의식화가 뒤따른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기실현을 하게 된다. 자기실현 또는 개성화란 결국 자기 전체의 인격을 실현하는 것을 말하는데, 융은 이것이 인간의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필연적 요구라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 속에는 정신의 분열을 지양하고 통일게 하는 요소가 내재하는데 이것이 분석심리학에서 ‘자기’ 혹은 본연의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아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무의식적인 것을 깨달음으로써 본연의 자기를 실현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무의식은 남김없이 의식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직 그 깊이를 모르고 그 성질을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므로 완전한 자기실현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이란 완전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원만 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전체를 실현시키는 근원적 능력이 무의식에 있는 것이며, 다시 말해서 무의식은 항상 그 근원적인 전체에의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의식에 작용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무의식적인 내용을 의식하도록 촉구한다. 의식이 그것을 외면하여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게 되면 보상적으로 증가된 무의식의 힘이 의식을 해리하거나 무의식의 콤플렉스가 의식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대개 바람직하지 못한 정신병리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 현상 뒤에는 해리를 지양하고 통일된 정신세계를 형성하려는 무의식의 지향성이 작동하고 있다. 이렇듯 무의식은 의식에 대하여 보상적 관계에 있다. 의식이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과 더불어 살 때 인간정신의 전체적 실현과 그 성숙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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